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프랑코 통치의 유산 === 프랑코의 비호 아래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 그리고 그들의 전횡, 실정과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은 현재 스페인 국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페인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측정한 청렴지수에서 2015년 기준 58점을 받아 조사대상 168개국 중 36등을 기록하였다. 특히 스페인은 지도부 주변층이나 지방 토호, 왕족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들어 스페인에서 벌어진 큼직큼직한 부정부패 스캔들의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후안 카를로스 1세|당시 국왕]]의 사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랏돈을 580만 유로(!!!)[* 한국 돈으로 약 76억 원 정도다.]나 횡령했다가 걸려서 해외로 반(半) 귀양을 간 일이 있다. 또 다른 예로, [[AVE|스페인 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도저히 수익을 낼 수가 없는 외딴 시골 마을이나 아예 대놓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역을 세워놓은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것 또한 지역 토호들의 욕심과 표심(票心)에 눈이 먼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기업가들 사이의 정경유착의 고리가 핵심 원인이다. 이런 일들을 한번 두번 겪으면서 잘못이 개선되는 게 않고 새 노선을 깔 때마다 유령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스페인 자국 주요 언론들도 대차게 깔 정도다. 그 밖에도 수많은 고위층의 비리 스캔들이 자고 일어나면 터진다. 무엇보다도 [[강약약강|강자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면서 약자 앞에서만 강한]] 사법부의 태도 또한 스페인의 부패척결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로 꼽히며, 이것 역시 프랑코식 철권통치의 어두운 유산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http://elpais.com/elpais/2016/01/18/eps/1453119411_414620.html|관련기사(스페인어)]]). 프랑코의 장기 집권 기간 내내 중앙의 귀족들과 지방의 토착 유지들, 그리고 금융권과 대기업들이 서로 치밀하게 결탁하여서 국가 시스템 내부에 깊숙히 파고들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이들에 의해 잠식당해버렸기 때문에 이들을 뿌리뽑는 게 쉽지 않다.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정치권과 권력기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크다. 프랑코는 전형적인 '''[[개발독재]]'''자였다. 독재자였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국가를 빈곤으로 몰아넣는 정책까지는 펼치지 않았다. 프랑코 사후 결국 그의 정권이 붕괴된 이유[* 내전 종결 후 스페인에서는 [[23-F]]를 빼면 유의미한 쿠데타가 없었다.] 역시 프랑코 정권이 개발독재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특별히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당시 스페인은 이미 19세기 말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개발독재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즉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개발독재를 펼친 것은 그가 무슨 스페인 국민들을 사랑하는 유능한 애국자여서라기보다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굳이 개발독재를 하지 않아도 정권 유지가 가능한 나라에서는 프랑코보다 더 머리좋고 유능한 독재자들도 굳이 개발독재를 하지는 않는다.[* 비교하자면 [[로버트 무가베]]는 독재자가 되기 이전에는 짐바브웨 가난한 농촌 출신인데 어퍼머티브 액션 따위 없이 남아공의 명문대에 합격한 수재였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에리트레아 독립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덕망 높은 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장악한 짐바브웨나 에리트레아의 경우 개발독재를 하지 않아도 외부에서 돈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개발독재조차 할 수 없는 지나치게 열악한 상황이었다. 프랑코의 스페인이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웨덴 등의 관광객을 상당수 유치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짐바브웨나 에리트레아는 주변국들도 상황이 엉망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프랑코에게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었던 바스크,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었던 반면 프랑코에 우호적이었던 (가톨릭 사제들과 기존 지주층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지방들은 상당수가 매우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프랑코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방들을 반드시 개발시켜서 바스크나 카탈루냐 지방과 비슷한 수준으로 경제 격차를 줄여야만 했다. 반면 이웃 포르투갈의 '''저'''개발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살라자르]]의 경우 아직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포르투갈 본토에서 바스크 지방이나 카탈루냐 지방처럼 분리주의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이런 문제가 없었다.] 스페인 내전을 시작한 건 물론 군부였지만 그 군부도 쿠데타 계획 당시부터 이런 우익 세력과 공동으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런 일반 우익 집단들의 지분은 무시할 수 없었다. 프랑코는 이렇세 특성 때문에 이런 여러 세력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 결과가 프랑코 정권의 개발독재이다. 프랑코의 경제개발은 [[정경유착]]을 통해 이루어졌고, 다른 우파 진영들의 쿠데타를 예방할 겸 경제발전의 이권은 [[우리가 남이가]] 마인드로 주변 친인척들과 정권을 지탱해주는 계층에게 뿌려졌다. 다른 한편으로 개발독재 정책이 진행된 결과, 경제상황도 안정되고 외국과의 교류도 늘어나면서 강경하던 스페인 우파 진영에도 온건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과거사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도하는 계층이 주로 왕족, 지방 옛 귀족 가문들과 결탁 된 금융권, 프랑코 정권의 비호 아래 큰 몇몇 재벌 등 어디어디 공작가 하면 많은 국민들이 알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중앙 왕실에서부터 동네 토호들까지 위아래로 고르게 썩은 물이 흐른다. 이 때문에 2010년대 재정 긴축의 그림자 아래 사는 현대 스페인인들은 아예 이런 체제를 고착시켜 버린 프랑코 정권과 이를 승계한 현대 [[보르본 왕조|보르본 3차 복고 왕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구 제2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아예 당장의 헌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같은 발상으로 반대편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네그린과 결탁해 공화진영에서 트롤링을 일삼은 공산당은 우익에게는 당연히 집중적으로, 좌파 내에서도 극딜당하며 현대 [[스페인 공산당]]은 의례적으로 '그 시절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한다'라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반면 스페인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영웅관에 딱 부합한다는 문화적 버프를 잔뜩 받은 [[전국 노동 연맹]](CNT)이나, 양쪽에서 버림 받은 시대의 피해자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같은 사람들은 비교적 전반적인 칭송을 받는 편이고, 적어도 그 순수성은 이념과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 편이다[* 프랑코 정권의 공식 사관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극우 성향의 역사학자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그의 저작, Nueva y definitiva historia de la guerra civil (1986)에서 [[마드리드 방어전]] 당시 [[두루티]] 휘하 아나키스트 CNT가 참 열정적으로 싸운다고 호평한 뒤, "그러나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분투는 아나키즘 자체가 현대 사회의 정신병적 현상이란 점을 고려하면 설명하기 힘든 미스테리한 일이다"라는 논평을 남겼다.][* 아나키스트들은 자기들이 사는 도시를 지키는데는 분명 유능했지만 이들의 군사적 행적은 한계 역시 뚜렷했다. 우선 잘 모르는 평지에서의 싸움에 약했고, 정부와 규율을 싫어하는 특성상 의용군 체제에 집착했다. 이 점 때문에 통일된 규율을 강조한 공산당과 중도공화주의자들에게 논쟁에서 밀리고 군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해서 정치적으로도 밀렸다. 조직력 떨어지는 의용군이 좋다면 하다못해 게릴라전을 했으면 나았을텐데 정작 그러지도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정작 공화국 정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 '''집권여당''' [[스페인 사회노동당|사회노동당]](PSOE)은 예나 지금이나 낭만적 미화의 대상이 되기 힘든 거대 정당이라서 과거에는 공산당이나 CNT에게 휘둘렸고, 현대에는 그냥 무능하다고 까인다. 하여튼 저렇게 수십만의 정적들을 학살하고, 좌파 성향 시민들을 나치 치하 독일의 소위 '열등민족'처럼 취급하고, 국제사회의 천민이 되도록 70년대까지도 처형에 정치범 탄압하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음에도 프랑코는 스페인의 좌파세력을 박멸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스페인에서 탄압받던 좌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통해 프랑스라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했던 선진 강대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고, 배편 하나만 타면 언어도 똑같으며 문화도 동질성이 강하고, 20세기 초중반 시점에서는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라 부르며 스페인 본토 출신인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중남미 국가로도 얼마든지 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같은 경우 예를 들자면 중남미 상류층은 자녀들을 대부분 영미권 대학에 보내는게 일반적이지만, 프랑코 정권 치하 학계의 단절 이전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스페인 자체의 학문적 경쟁력도 있고, 다른 언어권간 제도 통합도 현격하게 부족했던 시절엔 중남미 엘리트들은 여전히 살라망카, 마드리드, 코임브라 같은 옛 식민 모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육 받는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스페인/포르투갈과 구 식민지 국가들간의 유대감은 오히려 21세기 현대 와선 영미권 헤게모니의 부상으로 오히려 이 시대보다 약해진 경향이 있다.] 공간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봐도 스페인의 좌파 혁명가들은 나머지 유럽 대륙과 미주의 동지들과 행보와 투쟁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형성한 국제 좌파 네트워크의 일부이기도 했다. 프랑코 체제 아래서 스페인 좌파는 자국 내에서는 뿌리가 뽑히거나 지하로 들어가야했지만, 전 세계에서 수 만명의 반파시스트 투사들이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던 것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이후 스페인의 반체제 인사들은 의탁할 친구와 동지들이 유럽 각지에 많았으며, 심지어 [[샤를 드골]] 같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프랑코에 더 가까운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전후 여론과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에 공헌했던 빚을 고려하여 스페인 좌파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에 정착하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피레네 산맥 넘어 지하 활동을 하는 것도 묵인해줬다. 이런 대외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CNT, 사회주의 노동자당 산하 [[UGT]](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노동자 총연맹), 공산당 산하 [[CCOO]](Comisiones Obreras, 노동자 위원회) 같은 거대 노조들은 스페인 내전 이전부터 정치판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프랑코 치하에서 가해진 탄압도 이들의 활동을 지하로 몰아 넣을 수는 있어도, 이미 스페인인, 비스페인인 각계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활동을 필두로 20세기 민중 운동사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서 수 많은 활동가들과 추종자들을 재생산할 역량을 얻은 좌익 세력을 근본적으로 박멸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폴 프레스턴, 휴 토머스 등을 비롯한 현대에 스페인 근현대사의 거장으로 추앙 받는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는 프랑코 정권이 아직 현재진행형이었을 때 부터 외국인 신분을 이용하여 반체제인사들을 보호했고, 1964년 스튜어트 크리스티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스트 청년이 프랑코를 암살하려고 마드리드 백주 대낮에 폭발물을 대거 소지한 체로 체포당했을 때도 프랑코 정권은 자국민 앞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하지만 진짜배기 강대국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며 3년 동안 카라방첼 감옥 특실에 구금하다가[* 이 사람은 카라방첼 감옥 수감 중에서 한국로 치면 수능 비슷한 A-Level를 취득하기도 하며, 본인 인터뷰에서 자신은 영국인이라 감옥에서도 다른 스페인인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부끄럽다고 할 만큼 당국자들이 자신을 터치하지 못했다고 했다. 석방 이후 이 사람은 영국으로 귀환, CNT 계열 스페인 반체제 인사들 비호 활동에 주력하다가 현대에도 명망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살다 2020년 가을 자연사했다.]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압력 아래 석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체적으로 막강한 조직력과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뿌리 깊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이기도 했던 스페인 좌익들이 자국 내 활동 터전은 잃었어도 2차대전 이후 유럽과 미주 전역에서 성장한 시민 사회, 대중 매체와 적극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정권은 이미 더 조질 것도 없는 자국 내의 지하 세력 빼고는 아예 반체제 세력을 터치도 못하는 팔다리 묶인 입장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권의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를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며,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통일 스페인 민족 국가의 반좌빨 레콩키스타라고 규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60년대, 70년대 들어서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숨겨 왔던 지하 조직과 함께 정권에게 이빨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프랑코 사후에는 몇년 지나지도 않아 다시 당당한 사회의 주류 여론이자 거대 이해 집단으로 재부상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다.[* 유튜브에도 동영상이 올라와 있는 프랑코가 죽은지 고작 2년 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열린 [[CNT]] 총 대회만 해도 30만명의 군중이 집결하며 이들이 40년 동안 활동가 수 만명을 잃으며 철저하게 탄압 받았던 지하 조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원력과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정권 말기로 가면 갈수록 체제 유지와 반대파 탄압 능력 자체가 서슬퍼렀던 40년대와 달리 녹이 슬어버렸던 프랑코 정권의 말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좌익도 현대 들어서는 예전 20세기 초중반 국제 좌파의 전성기 CNT의 경우 정규 노조원 백만, 방계조직 이백만 운운하던 시절만큼의 대중 장악력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이건 서방 사회 전반의 트렌드에 가깝지 프랑코 정권의 억압성과 한계 같은 '스페인의 특수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이들 좌파 단체, 정당들이 재부상을 넘어 30년 넘은 세월이 흘러 기성 세력으로 정착하기까지 한 2020년대 현재 스페인에서 진보좌파 세력들은 '''헌정 질서 자체를 제2공화정으로 복고시킨다 vs 만다로 우익 세력과 치열한 줄당기기'''를 하고 있으며[* 사실 스페인의 민주화를 촉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위상 덕분에 진보/공화파 세력들조차 2000년대까진 입헌군주제를 공화정으로 복고시키자는 말은 섣불리 내뱉지 못했으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2010년대 들어 노망이 났는지 각종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르며 꾸준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2014년엔 아예 왕위에서 퇴위까지 했기에 스페인에선 공화정으로 돌아가자는 여론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프랑코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제2공화국의 삼색기는 스페인 어디를 가든 시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코가 엄청난 인권 탄압과 국제적 멸시를 감수하면서도 추구했던 '''강압적인 국론 통합'''이란 지상과제는 그가 죽자말자 바로 실패한 셈. 50년 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한 짓을 반대편인 우파에서 선례를 남긴 것이다. 프랑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프랑코 정권이 자국민 정치범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독소전쟁에서 독일 편으로 파병한 것은 어물쩡 넘어가면서 프랑코의 노련한 외교술로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영국과 독일 상대로 최대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적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라는 점이 논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랑코 정권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지원 덕분에 탄생했긴 하지만 그 외에도 영미의 암묵적, 간접적인 지원의 혜택도 상당히 누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은 19세기 말 [[미서전쟁]]에서 패배하고 식민지를 다 까먹으면서 게임 체인저로 활약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프랑코 정권은 독일, 이탈리아 외에도 영국, 미국과의 외교 라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이 쌍방으로부터 나름의 신뢰 혹은 무시를 당하게 된 원인이다. 물론, 연합국보다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연합국은 스페인에 경제적인 제제는 일종의 압력 행사수단으로 걸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은 남미쪽과 교역을 트고 있었는데 영국은 남미쪽의 물자가 독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봉쇄를 했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미국은 석유 수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스페인에서 돈 되는 대표적인 광물자원이 텅스텐인데 독일은 이 텅스텐의 최대 고객이었고 영미는 이를 불편해하여 스페인에 독일로의 텅스텐 수출을 막도록 압력을 가했다. 물론,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대신 텅스텐을 사주는 당근도 뿌리기는 했다. 다만, 당시 스페인의 국경 통제가 엉망이라 스페인이 막상 텅스텐 수출을 줄이려고 했어도 독일은 밀수를 통해 텅스텐을 수입하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아가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전 경제 수준을 대부분 회복한다. 1950년대 후반 쯤 되면 전쟁 전에도 상상치 못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의 낙인으로 인하여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군터를 비롯한 동시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으로만 유럽이지 차라리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다' 따위 소리나 듣고 있었다. 이처럼 냉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제적인 인식 역시 마냥 프랑코에 우호적이지만도 않았다. 애초에 내전 발발 시점이라면 모를까 파시즘이나 우익 성향 독재 하면 이를 가는 유럽에서 대외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정치적 센스를 요구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기회주의적, 보신주의적 면에선 능력자였다고 볼수 있다. 이게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득으로 이어지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리고 사실 프랑코는 의외로 자기가 모든 걸 다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치 체제 설계면에서는 세라노 수녜르 같은 자기 동서라던가, 핵개발[* 의외로 핵실험 직전까지 갔다.]이나 경제개발 등 내정면에서는 후안 블랑코 같은 믿을 만한 후계라던가 믿을만한 부하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기와 부하 장관들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프랑코는 더욱 사냥이나 그림 등 자기 취미나 사생활에 몰두하고 나랏일은 장관 아래 관료들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아예 손 안 땐 건 아니고 부하들이 대체할 수 없는 국가원수 겸 독재자로서 정치적인 역할은 여전히 수행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부하들이 나름 테크노크라트들이라 경제개발 등 내정 면에서 성과를 보여줬다. 또 스페인의 프랑코 추종자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2차대전 이후로 명맥이 끊기질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최후의 순수한 [[파시스트]]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코 정권이 1970년대까지 워낙 오래 버티다 보니 다른 서방 국가에서는 엄두도 못낼 저런 공개적인 파시즘 옹호 세력이 많은 편이다. 프랑코 정권이 학술적 의미로 순수한 파시즘이 맞냐 아니냐는 정권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인 문제지, 공교육 과정, 대민 선동 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는 차원에서의 프랑코 정권은 '''유대인들과 볼셰비키들의 사주로 스페인에 침투한 비국민 빨갱이들과 자유주의자들, 지역 분열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단일 가톨릭 스페인 민족을 수호하는 민족 운동 (Movimiento Nacional)'''이란 바람직하게 일관적인 전투적, 혁명적, 정화적 파시스트 운동으로 자신을 포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